시카리오 해석의 문을 열기 위해, 우리는 가장 먼저 법과 도덕이 안락하게 작동하는 문명사회의 환상에서 철저히 벗어나야 합니다.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의 걸작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Sicario)』는 정의를 수호하려는 FBI 요원 케이트 메이서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지대인 후아레스에서 마주하는 끔찍한 폭력의 민낯을 그립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카르텔 소탕 작전을 다룬 범죄 스릴러가 아닙니다. 이 영화의 뼈대에는 20세기 가장 논쟁적인 정치철학자 중 한 명인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권력 이론이 깊숙이 박혀 있습니다. 특히 슈미트가 주창한 ‘예외상태(Ausnahmezustand)’라는 개념은, 극 중 CIA 요원 맷 그레이버와 의문의 암살자 알레한드로가 자행하는 모든 잔혹한 초법적 행위를 설명하는 가장 완벽하고도 서늘한 철학적 열쇠입니다. 우리는 케이트의 붕괴하는 시선을 따라가며, 국가가 어떻게 스스로 만든 법질서를 정지시키고 야만의 폭력을 정당화하는지 목도하게 됩니다.
주권자의 결단: 법을 정지시키는 초법적 폭력
카를 슈미트는 그의 저서 『정치신학』에서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단하는 자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평상시의 국가는 헌법과 실정법이라는 ‘일상적 법질서’ 안에서 굴러가지만,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극단적 위기 상황이 도래하면 주권자는 기존의 모든 법적 절차와 권리를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초법적 권력을 발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외상태입니다. 영화 속에서 미국 정부, 그리고 그들의 의지를 대리하는 CIA 책임자 맷 그레이버는 멕시코 카르텔의 위협을 일상적인 범죄가 아닌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전쟁(예외상태)으로 규정합니다. 맷에게 있어 법치주의의 원칙이나 피의자의 인권은 한가로운 문명사회의 사치일 뿐입니다. 절차와 합법성(Legality)을 신앙처럼 믿고 따르는 FBI 요원 케이트는 그들에게 있어 작전의 합법적 외피를 두르기 위한 도구이자, 예외상태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극적 대조군에 불과합니다. 미국 정부라는 주권자의 결단이 내려진 순간, 후아레스의 작전 구역은 헌법이 완전히 작동을 멈춘 무법의 진공상태로 변모하게 됩니다.
| 구분 | 케이트 메이서 (일상적 법질서) | 맷 & 알레한드로 (예외상태) |
|---|---|---|
| 철학적 토대 | 절차적 정의, 헌법주의, 의무론적 윤리 | 결단주의, 극단적 실용주의, 마키아벨리즘 |
| 행동의 기준 | “이것은 합법적인가?” (실정법의 준수) | “이것은 목적 달성에 유효한가?” (초법적 실행) |
| 폭력의 성격 | 범죄자를 체포하여 사법 체계에 넘기기 위한 수단 | 질서를 통제하고 적을 섬멸하기 위한 직접적 심판 |
합법적 불법의 공간: 늑대들의 땅을 배회하다
슈미트의 예외상태 개념은 영화 중반부, 후아레스 국경 다리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총격전에서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됩니다.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다리 위에서, 맷의 전술팀은 총을 숨긴 카르텔 조직원들을 선제적으로 사살합니다. 케이트는 이 무자비한 살육전 앞에서 경악하지만, 맷과 전술팀에게 이는 완벽하게 정당한 교전 수칙의 이행입니다. 이 공간은 미국과 멕시코라는 두 주권 국가의 경계선임과 동시에, 어떠한 인권이나 법적 보호도 작동하지 않는 지대입니다. 우리 팝코기토(Pop Cogito)가 꾸준히 탐구해 온 지점, 즉 거대한 폭력 시스템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절대적 무력감이 케이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맷은 케이트에게 “이곳은 늑대들의 땅(Land of wolves)”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외상태 속에서는 법이 사라진 자리를 ‘생존’과 ‘힘’이라는 자연상태의 논리가 대체합니다. 국가의 안보라는 절대적 목적을 위해 합법적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모순된 공간, 그곳이 바로 맷과 알레한드로가 활보하는 예외의 제국입니다.
목적이 되어버린 수단: 정의를 대체한 잔혹한 질서
가장 끔찍한 비극은 예외상태가 일시적인 비상조치로 끝나지 않고, 그 자체가 항구적인 규칙으로 굳어질 때 발생합니다. 극 후반부, 맷의 진짜 목적이 카르텔의 근절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카르텔(콜롬비아)이 시장을 독점하게 만들어 폭력을 ‘통제 가능한 상태’로 관리하는 것임이 밝혀집니다. 정의의 구현은 애초에 그들의 안중에 없었습니다. 알레한드로가 카르텔 보스의 식탁에 앉아 보스의 아내와 어린아이들마저 가차 없이 몰살시키는 장면은, 국가의 묵인 아래 자행되는 복수가 얼마나 맹목적이고 잔혹한 심연으로 추락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카를 슈미트 해설에 따르면, 권력을 가진 자는 예외상태를 통해 도덕과 정치의 분리를 완성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알레한드로는 케이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모든 불법 작전이 합법적이었다고 증명하는 서류에 서명할 것을 강요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서명하는 케이트의 모습은, 법과 정의라는 고결한 이상이 예외상태를 등에 업은 압도적인 국가 폭력 앞에서 철저하게 굴복하고 강간당하는 처참한 상징입니다.
결론: 영원한 예외상태 속에서 길을 잃은 문명
결론적으로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악당을 처단하는 통쾌한 오락 영화의 외피를 찢어발기고, 현대 국가의 작동 원리에 내재된 폭력적 본질을 고발하는 묵직한 정치철학 서입니다. 카를 슈미트의 ‘예외상태’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이 영화는, 거대한 악을 통제하겠다는 명분 아래 스스로 더 큰 괴물이 되어버린 시스템의 붕괴를 증언합니다. 케이트가 국경 다리에서 마주했던 끔찍한 시체들과,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멕시코 소년들의 축구장 너머로 들려오는 둔탁한 총성들은, 이 예외상태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합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법, 질서를 위장한 야만. 늑대들의 땅으로 변해버린 세계에서, 작은 도시의 원칙주의자였던 케이트의 영혼이 산산조각 나는 과정은 곧 절대적 진리와 도덕을 잃어버린 채 무기력하게 표류하는 우리 현대 문명의 서늘한 자화상일 것입니다.
📚 사유의 확장을 위한 추천 콘텐츠
| 구분 | 제목 | 추천 이유 및 인문학적 접점 |
|---|---|---|
| 도서 | 『정치신학 (Politische Theologie)』 (카를 슈미트) | ‘예외상태’와 ‘주권자’에 대한 개념이 직접적으로 서술된 슈미트 정치철학의 정수가 담긴 저서. |
| 도서 | 『호모 사케르 (Homo Sacer)』 (조르조 아감벤) | 슈미트의 예외상태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국경 지대 희생자들의 ‘벌거벗은 생명’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철학서. |
| 영화 | 제로 다크 서티 (캐스린 비글로우) | 오사마 빈 라덴 추적 과정을 다루며, 국가 안보를 위해 자행되는 고문과 초법적 작전의 도덕적 정당성을 묻는 걸작. |
참고 문헌 및 출처
-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 그린비.
-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 새물결.
-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호모 사케르(Homo Sacer)』, 새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