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3가지 시선의 상실이 증명하는 인간의 자유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해석을 시도하며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 작품을 지배하는 맹목의 색채가 어둠을 상징하는 검은색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눈부신 백색이라는 사실입니다. 포르투갈의 거장 주제 사라마구가 그려낸 이 참혹하고도 아름다운 서사는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시야가 우유의 바다처럼 하얗게 멀어버리는 기이한 전염병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감염자들은 강제로 수용소에 격리되고, 그곳에서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던 모든 질서와 도덕은 순식간에 녹아내립니다. 이 극단적인 사고 실험은 독자들에게 한 가지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었던 것은 과연 내면의 고결함인가, 아니면 그저 나를 지켜보던 타인의 눈동자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매 순간 수많은 시선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거리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는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며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고 교정합니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기에 예의를 차리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수용소처럼 나와 타인 모두가 서로를 볼 수 없는 철저한 맹목의 세계가 도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사회적 제재의 가장 강력한 도구였던 시각이 상실되는 순간, 인간은 겹겹이 두르고 있던 문명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가장 원초적인 본성만을 앙상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타인의 시선이 소거된 백색의 밀실과 부끄러움의 증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탐구했던 시선(Le Regard)의 개념을 겹쳐볼 수 있습니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우리는 홀로 있을 때 자유로운 주체로 존재하지만 타인의 시선이 개입하는 순간 판단과 평가의 대상, 즉 객체로 전락합니다. 사르트르가 남긴 그 유명한 “타인은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는 명제는 타인의 시선이 나의 자유를 제한하고 나를 특정한 틀 속에 가두는 억압으로 작용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나로서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나를 대상화하는 타인의 시선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의 시선이 완전히 소거된 소설 속 수용소는 사르트르가 말한 지옥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의 공간일까요? 불행히도 사라마구가 묘사한 맹목의 세계는 참혹한 야만의 공간으로 변모합니다. 시선이 사라지자 인간은 타인에게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윤리적 책임감의 증발로 이어지고, 배설물이 뒹구는 복도와 폭력이 난무하는 병실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통제 장치가 사라졌을 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구분시선이 존재하는 사회 (일상)시선이 소거된 사회 (수용소)
타인의 의미나를 평가하고 행동을 제약하는 지옥이자 거울보이지 않는 물리적 장애물이자 약탈의 대상
도덕과 윤리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수치심과 사회적 체면 유지부끄러움의 상실로 인한 본능과 폭력의 해방
권력의 형태법과 제도를 통한 감시 및 규범적 통제물리적 힘(식량 통제)에 의한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지배

유일하게 보는 자가 짊어진 숭고하고도 무거운 책임

이 참혹한 아수라장 속에서 오직 단 한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만이 기적적으로 시력을 잃지 않습니다. 그녀는 모두가 장님이 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타인을 응시할 수 있는 주체로 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자신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맹인 행세를 하며 남편과 함께 수용소로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타인들은 그녀를 볼 수 없지만, 그녀는 타인들의 추악한 모습과 처참한 고통을 온전히 목격해야 합니다. 여기서 그녀가 지닌 시력은 권력이라기보다는 끔찍한 진실을 홀로 직면해야 하는 가혹한 형벌이자 무거운 도덕적 짐에 가깝습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단순히 타인의 시선을 억압으로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자유에는 반드시 절대적인 책임이 따른다고 강조합니다. 인문학 웹진 팝코기토(Pop Cogito)가 거듭 강조하듯, 진정한 인간성은 외부의 강제나 시선이 없을 때 비로소 그 민낯을 드러냅니다. 의사의 아내는 아무도 자신을 평가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기꺼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윤리적 주체가 되기로 결단합니다. 그녀의 헌신은 타인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실존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론 :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다시 타인을 감각한다는 것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시각 중심주의 사회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폭로함과 동시에, 시선이 사라진 폐허 속에서 우리가 새롭게 세워야 할 윤리의 이정표를 제시합니다. 시력이 상실된 수용소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서로를 짓밟고 약탈하며 짐승처럼 변해갔지만, 의사의 아내라는 이타적인 주체를 중심으로 점차 연대하고 서로의 손을 맞잡게 됩니다. 이들은 더 이상 눈으로 타인을 보지 못하지만, 피부의 온기와 목소리를 통해 타인을 감각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결국 이 눈부시고 잔혹한 하얀 맹목의 세계가 우리에게 남기는 위대한 사유는, 진정한 자유란 타인의 시선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타인과 연대하고 나의 책임을 다하는 데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서로를 지켜보는 눈이 모두 멀어버린 절망의 끝자리에서조차, 곁에 있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미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맹목의 전염병을 이겨내고 우리가 다시 눈을 뜰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숭고하고 다정한 인간성의 증명일 것입니다.


🎬 사유의 확장을 위한 추천 콘텐츠

분류콘텐츠명추천 이유
관련 영화도그빌 (Dogville, 2003)외부와 고립된 마을에서 선량해 보이던 이웃들이 타인을 어떻게 억압하고 착취하는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숨겨진 잔혹성과 도덕의 취약성을 서늘하게 파헤친 명작입니다.
관련 영화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2008)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을 영상으로 훌륭하게 옮겨낸 영화입니다. 시력을 잃은 자들의 공포와 백색의 화면 연출을 시각적으로 체감하며 사유를 확장하기에 무척 좋습니다.
관련 도서존재와 무본 비평의 중심축이 된 장 폴 사르트르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서입니다. 타인의 시선이 자아에 미치는 영향과 인간의 절대적 자유 및 책임에 대한 깊은 사유를 만날 수 있습니다.

📚 참고 문헌 및 출처

  •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 해냄.
  •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동서문화사.
  •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그린비.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