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쳐, 3가지 경계의 붕괴와 사이보그의 탄생

위쳐 비평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우리는 안제이 사프콥스키(Andrzej Sapkowski)가 창조하고 넷플릭스가 시각화한 이 잔혹한 대륙에 현대 페미니즘 철학과 과학기술학의 거장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를 소환하고자 합니다. 그녀의 기념비적인 저서 『사이보그 선언(A Cyborg Manifesto)』은 기계와 유기체의 결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공, 인간과 동물, 남성과 여성이라는 서구의 낡은 이분법적 질서를 교란하는 모든 불경한 ‘잡종(Hybrid)’들을 향한 찬가입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리비아의 게롤트는 검을 든 전사이자, 중세 판타지 세계에 강림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사이보그입니다.

게롤트가 겪은 ‘풀의 시험(Trial of the Grasses)’은 단순한 마법적 통과의례가 아닙니다. 독초와 연금술적 화합물을 혈관에 주입하여 신체의 유전자를 영구적으로 재구성하는 이 잔혹한 공정은, 철저히 목적 지향적인 생체 공학적 개조입니다. 그는 자연이 부여한 생물학적 조건을 거부하고(혹은 강제로 박탈당하고), 괴물을 사냥하기 위한 ‘도구’로서 새롭게 프로그래밍 되었습니다. 유기체에 기술적 변이가 가해진 이 돌연변이의 육체야말로 해러웨이가 말한 사이보그의 체화 그 자체입니다.

순수성의 신화를 파괴하는 불경한 잡종들

대륙의 평범한 인간들은 위쳐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경멸하고 두려워합니다. 위쳐가 엘프나 드워프처럼 태생적인 타자가 아니라,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모호한 경계선상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해러웨이는 유기체적 순수성이나 에덴동산으로의 회귀 같은 신화를 거부합니다. 순수함은 언제나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폭력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드라마 속 인간 군상들은 스스로를 순수하고 정상적인 존재로 규정하기 위해 엘프를 학살하고 마법사들을 화형에 처하며 위쳐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끔찍한 탐욕과 학살을 저지르는 것은 늘 숲속의 괴물이 아닌, 왕관을 쓴 ‘순수한’ 인간들입니다. 게롤트는 이 위선적인 대륙에서 “차악(Lesser Evil)”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는 인간과 괴물 중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이분법적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사안의 맥락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사이보그적 윤리를 실천합니다.

이러한 경계의 해체는 비단 게롤트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권력을 위해 자신의 자궁을 뜯어내고 외모를 재구성한 예니퍼(Yennefer), 그리고 여러 종족의 피가 섞인 채 예언의 중심으로 던져진 시리(Ciri) 역시 생물학적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직조해 나가는 잡종적 존재들입니다.

존재 양식순수 인간 (대륙의 지배층)위쳐 (사이보그적 존재)
탄생과 기원자연적 생식, 혈통과 신분 중시연금술과 마법을 통한 기술적 재구성
가치관과 도덕선악의 이분법, 타자(괴물/엘프) 배제맥락 중심의 판단, 이분법적 가치 거부
신체의 정체성생물학적 온전함에 대한 맹신흉터와 변이로 가득한 파편화된 잡종

혈연을 초월하여 직조되는 대안적 연대

해러웨이 사유의 가장 아름다운 지점은, 파편화되고 기원이 없는 사이보그들이 ‘정체성(Identity)’이 아닌 ‘친밀성(Affinity)’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위쳐와 마법사는 생물학적 변이의 부작용으로 인해 생식 능력을 상실합니다. 즉, 이들은 피를 나눈 가족을 만들거나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계도를 이어나갈 수 없는 단절된 개체들입니다.

팝코기토(Pop Cogito)가 『위쳐』의 서사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불임의 존재들이 운명으로 엮여 만들어내는 기형적이고도 숭고한 대안 가족의 형태입니다. 게롤트와 예니퍼, 그리고 시리는 서로의 피비린내 나는 상처를 알아보고, 철저한 필요와 선택에 의해 가족이 됩니다. 이들의 연대는 혈연이라는 자연적 굴레에 얽매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강력하고 주체적입니다.

의외의 법칙(Law of Surprise)은 언뜻 보기에 맹목적인 운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소녀의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은 온전히 돌연변이 게롤트의 의지입니다. 그들은 각자가 짊어진 ‘다름’을 배제의 근거가 아닌, 서로를 껴안는 환대의 조건으로 삼습니다. 정상성의 궤도에서 이탈한 자들이 모여 가장 따뜻한 불꽃을 피워내는 이 역설은 진정한 사이보그적 연대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 운명이라는 코드를 스스로 재작성하는 자들

게롤트가 내뱉는 냉소적인 욕설 뒤에는 이분법적 폭력으로 물든 세상을 향한 깊은 통찰이 숨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위쳐를 도구로 사용하려 하지만, 그는 누군가의 통제에 복종하는 기계가 되기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는 자신의 괴물 같은 신체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깃든 인간성 한 조각을 끝까지 지켜냅니다.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가 우주론적 전체성이나 구원의 신화에 매달리지 않으며, 그저 모호한 경계 위에서 치열하게 살아갈 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대륙의 안개를 헤치며 괴물의 발자국을 쫓는 게롤트의 고독한 뒷모습은 정확히 그 선언과 겹쳐집니다. 그는 선의 화신도, 악마도 아닙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의 코드를 다시 써 내려가는 위대한 돌연변이일 뿐입니다.

결국 『위쳐』는 잡종화된 신체를 이끌고 폭력적인 세상과 대결하는 한 생명체의 치열한 실존주의적 투쟁기입니다. 경계가 무너진 시대, 오직 스스로를 긍정하는 자만이 괴물들의 세계에서 파멸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이 서늘한 다크 판타지는 피와 강철의 무게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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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및 출처

  • 도나 해러웨이,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Simians, Cyborgs, and Women), 민경숙 역, 동문선.
  • 안제이 사프콥스키, 『위쳐』(The Witcher), 이지원 역, 제우미디어.
  •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How We Became Posthuman), 허진 역, 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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